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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민신문 특집>조선말 사대부 27인 편지, ‘우경 안정구 선생 간찰집’ 국역 출간..안재식 엮음 2025.2.13

by 시인 안재식 2025. 2. 17.

<용인시민신문 특집>조선말 사대부 27인 편지, ‘우경 안정구 선생 간찰집’ 국역 출간..안재식 엮음 202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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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조선말 사대부 27인 편지, ‘우경 안정구 선생 간찰집’ 국역 출간 - 용인시민신문

시대를 넘어 150여 년 전 사람들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우선 흥미롭다. 사대부 고관대작들 사이에 오간 편지인지라 국역과 해제 그리고 주석에 의존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용인 백암출신 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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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백암출신으로 충주영장 재직 당시 당대 명망 인물들 교류
엮은이 증손자 안재식 작가 “조선말 시대상 생활사 연구에 귀중
시대를 넘어 150여 년 전 사람들의 편지를 읽는다는 건 우선 흥미롭다. 사대부 고관대작들 사이에 오간 편지인지라 국역과 해제 그리고 주석에 의존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용인 백암출신 우경 안정구(1828~1881) 선생이 조선말 국정에 참여한 주요 인물 27인으로부터 받은 32통의 친필 편지 희귀본을 144년 만에 한글 번역으로 발간했다. 지난해 11월 안정구 선생의 증손자로 시인이자 동화작가 안재식에 의해서다.


‘조선말 사대부 27인의 편지, 우경 안정구 선생 간찰집’ (학자원 264쪽)은 당대에 내로라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간찰(簡札)을 한데 묶어 발간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안 작가의 증조부인 우경 안정구 선생이 충주영장으로 재직하던 1879년 6월부터 1880년 6월까지 약 1년여간 받은 32통의 친필 편지 모음이다. 안 작가 부친인 안필형(安珌炯, 1893~1949) 선생이 유산으로 물려받아 한지 양면에 배접(褙接)해 서첩으로 엮었다.

우선 우경 안정구(禹卿 安珽求) 선생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죽산이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인차외만호, 사천현감, 부호군 등을 역임하였고,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구 선생 손자 안필형서첩으로 엮어 후대에 전수 여기서 ‘인차외’는 함경도 갑산군의 요충지역으로 적이 주로 쳐들어오는 길목이었다. ‘만호’는 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의 관직으로서 한때 이순신 장군도 용인출신 이일 장군(李鎰, 1538~1601) 휘하에서 1587년 여진족의 녹둔도 침략 당시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의 직책을 가진 바 있다. 후일엔 전라도 발포진 수군만호(종4품)를 지냈다.

안정구 선생은 1879년 6월부터 1880년 6월까지 충주영장(忠淸道後營將)으로 재임했으며, 이후 종2품 오위장과 평안북도 삭주 부사를 지냈다. 삭주 부사로 재임 중 대홍수 수습 과정에서 순직하였고, 생가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안정구 선생이 명사들과 교류하며 간찰을 남긴 시기는 그가 충주영장으로 파견돼 있던 때다. 충주영장은 중앙에서 파견한 정3품 당상관으로 충주목사와 동급이었다. 충주, 제천, 단양, 괴산, 음성 등 8개 군을 관장하는 사령관급 최고 지휘관이다.

특히 충주는 중앙과 남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였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충주영장은 이 지역에서 병력 운용, 훈련,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유사시 충주산성과 관련된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안필형 선생이 물려받아 배접해 서첩으로 엮은 원본의 표구는 35폭 병풍 모양으로 접었을 때 두께는 3cm, 크기는 가로 17cm 세로 29.7cm, 펼쳤을 때 길이는 595cm나 된다. 그 후 안 작가의 부친이 작고하고 모친 이기만(李奇滿) 여사가 물려 받아 6·25 전쟁의 피난살이 등 고단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귀히 간직하다가 아들인 안 작가에게 전승해 마침내 빛을 보게 됐다. 안 작가는 서첩을 토대로 ‘우경 안정구 선생 간찰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2019년부터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국사편찬위원회 박상수(朴相水) 교수의 탈초・번역과 편집위원 원숙희(元淑姬) 작가의 교정・교열을 거쳐 4년 만에 출간하게 됐다.

조선말기,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대변되는 격변의 시기를 거치며 144년간이나 서첩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대를 이어 전승하고 출간까지 했다는 사실이 높게 평가된다. 이 책은 간찰문(초서・행서)을 원형 그대로 스캔받아 게재하여 서체의 예술성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탈초 한자에 한글로 독음을 달아 한문 공부에 도움을 줬다. 또 간찰집에 등장하는 인물의 프로필을 진솔하게 기록했고, 주석을 상세히 달아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했다.

친필 편지 27인은 흥친왕 이재면, 충정공 민영환, 영의정 김병국, 대제학 민태호, 무위대장 이경하, 포도대장 김기석, 병조판서 민영익, 선혜청당상 민겸호, 공조판서 김병주, 형조판서 홍재현, 충주목사 조신희, 오위도총관 김흥균, 대사성 김경균, 도승지 이태용, 이조판서 민영준, 금군별장 허습, 충청병사 이봉의, 한성좌윤 박장하, 우정총국사사 심상기, 전의현감 김제봉, 훈련판관 이명현, 내금위장 이두현, 유생 심능호, 기사장 정약풍, 포침랑 심윤택 등 철종과 고종 시대를 살았던 유생으로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편지가 담겼다.

우경 안정구 선생이 받은 편지글 중에서 시대상을 반영하는 내용들이 눈길을 끈다. 금군별장(경호실장급) 허습은 ‘상주인 처지에 초(燭)를 구하기 매우 어렵다’는 딱한 사정을 전한다.

흥친왕 이재면은 ‘왕세자 이척(훗날 순종)이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된 소식’을 전하고, 홍문관교리 이태용은 ‘부친이 병을 겪고 원기가 다해 애태우고 있는데, 도하에 돌림병이 불처럼 일어나 사망자가 속출하여 모두 두려워한다’고 썼다. 유생부터 영의정까지 다양한 계층과 교유 내용 흥미로워 형조판서 홍재현은 ‘왕대비를 10여 년간 모시며 명을 전달하던 정 지사가 아랫사람에게 치욕을 당했으니 그 분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포도대장 김기석은 ‘이웃 마을 임상서 어른의 집안 사정을 전하며 독촉을 늦추어 체면을 살려달라’는 청탁도 나온다.

특히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순국자결로 저항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서찰이 눈길을 끈다. 그의 묘는 기흥구 마북동에 있다. 순국 25년 전 충정공 민영환의 편지 내용은 ‘조카가 내지 못한 세금을 그의 삼촌에게 대신 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니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한 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문은 이렇다.
“큰 바람이 따듯한 봄기운이 한창인데, 요새 정사를 보는 안부를 여쭙니다. 그리운 마음 간절하고 또 축원드립니다. 저의 부모님은 그럭저럭 별 탈없이 지내고 계신 것이 사적으로 다행입니다. 다름 아니라, 이번에 드리는 태록(본 편지에 딸려 보내는 첨부 자료)을 보면다 아실 겁니다. 이 가서(家書, 집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특별히 그는 행실을 삼가고 꾸밈없이 고향에서 지내는 에절이 절로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조카의 잡기와 채장(빚진 돈 액수를 적어두는 장부)을 소급하여 이 사람에게 징출(세금을 대신 물게 하는 일) 하라는 걸 용인하는 건 이치상 맞지 않습니다. 이는 반드시 죄상이 잘못 전해져 염탐에 걸려든 것으로 개탄스럽니다. 그러하니 편지가 도착하는 날, 곧바로 엄하게 실상을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에서 잘못 소입(일에 들어가는 비용)되는 것을 하나하나 신곡에다 추급(추심)한 뒤에 다시 침어(侵漁, 가렴주구의 뜻)하는 상황이 많아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만약 대수롭게 여길 일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까? 나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재식 작가는 “조선말 사대부들의 유려한 필치와 당시 생활상, 꾸밈없는 시대 상황, 벼슬아치들의 청탁과 처세 등 민낯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생활사 연구와 인물 탐구에 중요한 자료니만큼 유형문화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경 안정구의 고향인 백암면 용천리에는 죽산안씨 집성촌과 세장지가 있다. 안정구 선생이 홍수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향년 54세로 순직하자 나라에서는 살신성인으로 백성들과 고난을 함께하다 순직한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생가가 있는 고향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산55-7 선영으로 운구(運柩)하여 예장으로 치제(致祭)하며 애도했다.

(정리)우상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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